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천안문 6.4 항쟁 (문단 편집) === 온건대응주장 === * [[자오쯔양]] 사건 이후 실각. * [[친지웨이]] 국방부장.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덩샤오핑의 진압명령이 내려오자, 국내사건의 군개입은 내정을 책임지는 총리 [[자오쯔양]]의 재가를 받아야 한다는 핑계를 들어 계속 시간을 끌었다고 한다.[[http://www.smh.com.au/world/how-top-generals-refused-to-march-on-tiananmen-square-20100603-x7f0.html|#]] 결국 거듭되는 압력에 명령을 수행했으나, 결과적으로 덩샤오핑의 노여움을 사서 국방부장의 일반적인 임기인 10년(5+5)을 못채우고 5년 단임으로 내려온다.[* 다만 [[자오쯔양]]이나 [[쉬친셴]]처럼 군,정계에 완전히 쫒겨나지 않았으며 이후 전국인민대표대회 부회장을 역임해 나름대로 대우는 받았다. 그의 자식들도 [[인민해방군]] 장교를 역임하고 있는데 그중 장남이자 現 동부전구 부사령원군 사령원인 친웨이장 중장은 [[흑사회]]를 박살낸 것으로 유명하다.[[https://einhal.tistory.com/m/entry/중국군-VS-흑사회|#]]] * [[장아이핑]](전 해군사령원), [[예페이]](전 해군사령원), [[양더즈]](전 총참모장), [[샤오커]](전 군정대학 교장), [[쑹스룬]](전 군사과학원장), [[리쥐쿠이]](전 총정치위원), [[천짜이다오]](전 우한군구 사령관) 모두 상장(上將)으로 국공내전부터 활약한 군원로였다. 이들은 덩샤오핑이 위원장이 있는 중앙군사위원회에 공동명의의 편지를 보내서 군투입을 반대했다. 다만 강경대응을 반대했기 보단 [[덩샤오핑]]이 자신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계엄을 결정한것에 대한 항의였으며 실질적으로 군투입을 반대했는지는 불투명하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장아이핑을 비롯한 7명의 원로 상장이 계엄령 및 군투입을 반대했다는 사실은 여러 소스에서 확인되고 있다.[* [[https://cn.nytimes.com/china/20190603/pla-daily-reporter-1989-lhasa-to-beijing/|뉴욕타임즈 중국어판 2019년 6월 3일자]](인민해방군 기관지 해방군보 기자 장림(江林)의 증언). 나와 전총참모부 훈련처장 장성(张胜)은 장아이핑의 전기를 쓰기 위해 그를 방문했다. 장아이핑은 7명의 상장이 나서기 전에 중앙군사위원회에 단독으로 보고를 했다고 말했다. 그때는 아직 계엄이 내려지지 않았는데, 그(장아이핑)는 이 상장들을 이끌고 광장에 가서 학생들과 대화한 후, 중군위에 학생들과 대립하지 말것을 요구했다. "우리(중국공산당 초기지도자들)도 소시적에 학생운동을 했는데, 왜 그들(학생)들과 대화하지 않고 적으로 삼느냐. 이들이 단식해서 병든 모습을 봤는데 왜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느냐."] * [[쉬친셴]] 베이징군구 38집단군 군장. 중장. 출동명령을 거부하였다가 가택 연금당했다. 사태 종료 후에 5년형을 선고받았다. * [[완리]] * [[후치리]] 2년 후 정치국에서 실각하여 지방으로 좌천됐다. * [[녜룽전]], [[쉬샹첸]]: 생존해 있던 두 명의 개국원수로 당시 군최고 원로였다. 계엄에는 반대하지 않았으나 유혈 사태에는 반대한다고 개인적으로 입장을 표명했다. * [[천이쯔]]: 국무원 체제개혁연구소장. 자오쯔양의 측근으로 무력진압에 반대하다가 유혈사태를 목도하고 공산당 탈당을 선언한 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중공의 기밀 문서를 공개하여 미국의 중국학계에서 활동했다. 말년에 중국 귀국을 요청했으나 중국 정부가 공개전향과 사회활동 불참을 요구하자 거부하고 미국에 잔류하다가 2014년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